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짐가방과 싸우기 시작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짐가방과 싸우기 시작했다

결혼식 끝나고 정신없이 공항으로 달려가던 그날의 기억은 사실 거의 없다. 그냥 몸이 붕 떠 있는 기분이었고, 예식장에서 정신없이 인사하고 나니 이미 입안은 바싹 말라 있었다. 남편은 옆에서 계속 어디 티켓 챙겼냐, 여권은 있냐, 짐은 다 실었냐 묻는데 그게 왜 그렇게 귀찮았는지 모른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발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때는 정말 꿈꾸던 신혼여행이 시작될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보니 현실은 사진 속의 그 평온한 풀빌라와는 조금 달랐다. 우선 공항에서부터 삐끼들이 너무 들러붙어서 정신이 없었다. 택시비 흥정하는 것부터가 시작이었는데, 한국에서 웨딩박람회 다니며 혼수 준비하고 예식장 알아볼 때보다 이게 더 피곤할 줄은 몰랐다. 대략 비용을 생각해보면 항공권이랑 숙박비 합쳐서 천만 원 정도 잡았는데, 현장에서 쓰는 돈까지 계산하니 통장이 정말 순식간에 녹아내리는 게 눈에 보였다.

풀빌라의 습기와 생각지 못한 벌레들

우리가 예약한 곳은 나름 이름 있는 발리 풀빌라였다. 인스타그램에서 다들 한 번씩은 본 것 같은 그런 곳. 그런데 막상 방에 들어갔더니 습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에어컨을 아무리 세게 틀어도 눅눅한 기운이 사라지질 않아서 며칠 동안은 옷 입을 때마다 찝찝한 기분을 견뎌야 했다. 더 큰 문제는 벌레였다. 남편은 낭만적인 밤을 보내고 싶어 했지만, 나는 밤마다 화장실 구석에 나타나는 정체불명의 곤충들 때문에 잠을 설쳤다. 끄라비로 갈지 코사무이로 갈지 끝까지 고민하다가 결국 여기로 온 건데, 차라리 그냥 익숙한 리조트를 갈 걸 그랬나 싶기도 했다. 남편은 괜찮다고 했지만, 사실 그 사람도 벌레를 엄청 싫어해서 밤에는 내가 깬 척하면 같이 일어나서 조용히 곤충 퇴치제를 뿌리곤 했다. 신혼여행 와서 로맨틱한 대화 대신 ‘저거 뭐야?’, ‘잡았어?’ 이런 말만 주고받으니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한편으론 좀 허무했다.

밖으로 나가려니 길 찾기가 보통 일이 아니다

숙소에만 박혀 있기도 좀 그래서 근처 시내로 나가보려고 했다. 그런데 발리의 도로는 생각보다 좁고 복잡했다. 지도 앱을 켜봐도 어디가 어딘지 도통 모르겠고, 날씨는 또 왜 그렇게 덥던지. 몇 번 길을 잘못 들고 나니 남편이랑 슬슬 말투가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분명 한국에서는 싸우지 말자고 다짐했는데, 더운 날씨에 땀 흘리며 걷다 보니 서로 예민해지는 건 어쩔 수 없더라. 한국에서야 광명역 예식장 예약하고 준비할 때처럼 일이 딱딱 진행되는 것도 아니고, 모든 게 즉흥적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모든 게 신기하고 재밌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이 돈 내고 내가 왜 여기서 이 고생을 하나’ 싶은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렇다고 다시 호텔로 돌아가기엔 억울해서 꾸역꾸역 목적지까지 갔는데, 막상 가보니 사진만큼 예쁜 곳은 아니었다. 정말 허무했다.

한국에 돌아와서야 비로소 차분해진 마음

여행 마지막 날, 비행기 타기 전 공항 라운지에 앉아 있는데 그때서야 비로소 숨이 좀 쉬어졌다. 남편도 옆에서 지친 기색이 역력했는데, 서로를 보며 그냥 피식 웃었다. 우리가 뭘 기대했던 건지 모르겠지만, 사실 신혼여행이란 게 매일같이 화보 촬영하는 것처럼 지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주차장에 세워둔 차를 보니 그제야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실감이 났다. 근데 웬걸, 차 범퍼가 살짝 긁혀 있는 걸 보고 멍해졌다. 신혼여행 중에 차 수리비 걱정까지 하게 될 줄이야. 남편은 나중에 처리하자며 애써 웃었지만, 나는 그냥 그 자리에 서서 한숨을 푹 쉬었다. 결혼하고 나면 모든 게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사실 시작에 불과하다는 걸 그때 깨달았던 것 같다. 여행지에서의 그 눅눅한 공기와 낯선 벌레, 그리고 길 찾느라 땀 흘리던 기억들이 이제는 그냥 좀 웃긴 추억이 되어가고 있다.

다시 간다면 조금 다르게 해볼까

다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렇게 빡빡하게 일정을 짜지는 않을 것 같다. 너무 많은 걸 보고 싶어서 하루에 세 군데씩 돌아다녔던 게 화근이었다. 그냥 하루는 풀빌라 수영장에만 누워있고, 하루는 정말 맛있는 거 한 끼 제대로 먹는 식으로 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몰디브 여행사 통해서 좀 더 여유로운 패키지를 알아볼 걸 그랬나, 아니면 그냥 가까운 일본이나 다녀올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가끔 든다. 그래도 남편과 둘이 낯선 곳에서 고생하며 서로를 조금 더 알게 된 건 사실이다. 이 사람이 화가 나면 어떻게 침묵하는지, 내가 짜증이 날 때 어떤 식으로 나를 달래는지 같은 사소한 것들 말이다. 완벽하게 행복한 여행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행한 여행도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우리가 처음으로 함께 겪은 아주 긴 ‘현실’이었던 셈이다. 앞으로 살면서 겪을 수많은 일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