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한복판에서 내 가치가 숫자로 매겨질 때

강남 한복판에서 내 가치가 숫자로 매겨질 때

상담실 책상 위에 놓인 태블릿 PC

친구 녀석이 하도 성화여서 억지로 시간을 냈다. 강남역 근처에 있는 이름만 대면 다 아는 대형 결혼정보회사였다. 입구부터 향수 냄새가 짙게 났고, 로비 소파에는 각자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예약 시간보다 15분 일찍 도착했는데도 상담 실장은 이미 준비를 마친 눈치였다. 커피 한 잔을 건네받고 앉았는데, 왠지 모르게 면접장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태블릿 PC를 쓱 밀어주더니 기본 인적 사항을 입력하라고 했다. 연봉, 부모님 직업, 최종 학력, 거주지까지. 내가 살아온 30대 후반의 삶이 고작 몇 개의 칸 안에 압축되는 과정이 묘하게 불쾌하면서도 한편으론 궁금했다. 내 점수는 몇 점이나 될까.

200만 원부터 1,000만 원까지의 간극

상담 실장은 웃으면서 말을 참 잘했다. 내 학벌이나 직업군이 나쁘지는 않지만, 지금 시장에서 원하는 ‘최적화된 매물’은 아니라는 뉘앙스를 풍겼다. ‘가입비’라는 단어 대신 ‘성혼 사례비’와 ‘진행비’라는 단어를 섞어서 썼다. 대충 들으니 가입비만 최소 200만 원에서 많게는 1,000만 원까지도 갈 수 있다고 했다. 횟수 제한이 있는 상품도 있었고, 1년간 무제한으로 소개해주겠다는 상품도 있었다. 100만 원 단위가 오고 가는데도 마치 마트에서 장을 보는 것처럼 태연하게 숫자를 나열하는 모습이 낯설었다. 이걸 결제한다고 해서 당장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는데, 왜 이렇게 다들 여기에 목을 매는 건지 싶었다. 사실 그때 내 통장에 300만 원을 당장 쓸 여유가 있었는지도 의문이었다.

사내 연애나 동호회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

예전에 잠시 관심 가졌던 연애 어플이나 외국인 친구 사귀기 커뮤니티 같은 곳과는 결이 달랐다. 거기는 적어도 ‘사람’을 만나러 가는 느낌이었는데, 여기는 ‘조건’을 검증받으러 가는 곳 같았다. 상담 실장은 노골적으로 내 나이를 언급하며, 이제는 선택의 폭이 좁아지는 시기라고 강조했다. 사실 40대 모임이나 동호회에 나가면 그래도 사람 냄새가 나는데, 여기는 철저하게 서류 위주였다. 등본, 재산 증명, 소득 증명원까지 떼어와야 한다는 말을 듣는데,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내가 누군지 증명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든 거다. TV에서 전현무가 점수 굴욕 당하는 걸 보고 웃었는데, 막상 내 처지가 되니 그게 결코 남 일 같지가 않았다.

밖으로 나왔을 때의 묘한 공허함

상담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강남의 저녁 공기가 찼다. 상담 실장이 마지막에 했던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지금 결정 안 하시면 1년 뒤에는 정말 쉽지 않으실 거예요.”라는 그 한마디. 마치 내가 무슨 유통기한이라도 다 되어가는 상품이 된 기분이었다. 집에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괜히 친구에게 전화해서 짜증을 냈다. 너 때문에 기분만 상했다고, 사람이 무슨 상품이냐고. 친구는 그냥 웃어넘겼지만, 솔직히 나는 내 점수가 몇 점인지, 아니 사실은 내 점수가 낮게 나올까 봐 겁이 났던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날 밤 집에 와서 소득 증명 서류를 떼려고 국세청 사이트에 로그인했다가, 비밀번호를 잊어버려서 결국 끄고 잤다. 그냥 당분간은 혼자 지내는 게 더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근데, 어쩌면 나도 조만간 다시 그 사무실 문을 두드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댓글 2
  • 30대 후반의 삶이 숫자로 표현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보니, 개인적인 경험과 가치관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것 같아 좀 안타깝네요.

  • 이런 기분, 진짜 공감해요. 나도 뭔가 평가받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그런 곳에 들어갔던 적 있거든요.